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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피-5

황제의 피-5

 

의심의 늪

몸은 다른 때보다 유난히 가뿐했다.

다른 때는 발정기가 끝나도 몸이 무거웠는데 오늘 별당을 나서는 해원의 몸은 유난히 가벼웠다.

마치 따뜻한 물에 몸을 푹 담그고 개운하게 씻고 나온 것처럼 몸이 가뿐했다.

기분 탓인지 평소보다 몸에서 풍기는 단내가 옅어진 것도 같았다.

‘이게 전부 그 꿈 때문이야...’

어째서 그런 꿈을 꾸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몸이 이렇게 가벼운 것은 전부 꿈과 꿈 속의 사내 무랑군 덕분이다.

별당에서 나와 본궁으로 돌아오기 전에 해원은 대나무 숲에 잠시 들렀었다.

그러나 대나무 숲에는 아무도 없었다.

예상했지만 대나무 숲에서 그 사내를 만날 수는 없었다.

그 사내와 교접을 나누었던 곳까지 갔지만 그곳에서도 역시 다른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흙이 뭉개진 곳도 없었고 대나무가 꺾인 곳도 없었다.

그 사내와 이야기하며 혹시 몰라서 곁의 대나무 어린 순을 살짝 꺾어 놓았었다.

돌로 작은 탑도 쌓았다.

그러나 길을 따라 들어간 대나무 숲 안에서 꺾인 어린 순도, 쌓아올린 작은 탑도 발견하지 못했다.

꿈이라는 명백한 증거였지만 대나무 숲에서 돌아나오는 발은 떨어지지 않았다.

꼭 그 사내를 그곳에 두고 오는 것처럼 말이다.

뒤에서 그 사내를 저를 부르는 것처럼 바람이 불 때마다 대나무가 쏴아아- 쏴아아 소리를 내서 해원이 몇 번이나 돌아봤는지 모른다.

“신당 말입니까, 마마?”

본궁의 공주궁으로 돌아온 해원이 제일 먼저 유모를 불러다 물었다.

궁금한 것이 생겼기 때문이다.

꿈에서 들은 말이긴 하지만 잊혀지지 않고 계속 머릿속에 남은 내용이 있었다.

[오래 전에 이 땅에서 신을 섬기는 건 금지되었으니까.]

신녀에 대한 것이었다.

해원은 신녀나 신당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

남월은 신이 없는 나라다.

물론 백성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섬기는 산신과 이름 모를 신들이 있겠지만 신당을 짓고 그 신당과 신을 섬기는 신녀까지 있을 정도라면 이름모를 신이나 산신은 아닐 것이다.

해원은 아직 이 도읍의 역사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다.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예전에 이곳은 북연이라는 나라였지만 부왕에 의해 하나로 통일되어 지금은 남월이 되었다는 것 정도다.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혹시 알고 있는 것이 있어? 예전에 이곳에 신당이라는 것이 있었어?”

“있었지요.”

유모가 주위를 조심스럽게 살피며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황명으로 공주궁 주위를 얼씬거리는 사람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유모는 습관적으로 주변을 살폈다.

“어떤 신의 신당이었어?”

“북악신이라고, 예전에 북연 사람들이 섬기는 신이 있었다고 들었지요.”

“북악신...”

“그런데 지금은 왜 없는 거지?”

“그야 폐하께서 국법으로 금하셨으니까요. 북악신을 섬기는 것을 국법으로 금지하고 어기는 자는 형벌을 내린다고 하니 사라진 것이지요.”

진짜로 있었던 일이다.

“그러면 혹시 그 북악신의 신당 중에서 불에 탔던 곳도 있을까? 그러니까 신당에 불에 타서 신녀가 함께 타죽은 일이 있었다거나...”

“에그머니나!”

깜짝 놀란 유모가 손에 들고 있던 뜨개 바늘을 떨어뜨렸다.

“유모? 왜 그래?”

“그, 그, 그걸 어디서 들으셨어요, 마마?”

유모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마치 죽은 사람을 본 것처럼 말이다.

“그냥,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어디서 들은 것 같아서.”

꿈 속의 사내에게 들었다고 말하면 미쳤다고 할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해원이 대충 둘러댔다.

그런데 이 질문이 이렇게 놀랄 만한 질문일까?

“마마, 어디 가서 절대로 지금 하신 말씀을 입밖에 꺼내시면 안 됩니다. 아시겠지요? 특히 폐하 앞에서는 절대로, 절대로 꺼내시면 안 됩니다.”

“왜? 무슨 일인데 그래?”

“마마. 북악신을 섬기는 건 폐하께서 국법으로 금지시키셨다고 지금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북악신을 섬기는 것 자체가 죄가 되니 거기에 대해서 말만 꺼내도 죄가 되는 겁니다.”

“섬기지 않고 그냥 물어만 보는 것도 죄가 된다는 거야?”

“북악신과 그 신당에 대해서는 금기입니다, 마마. 죽은 신녀 역시요.”

유모의 말에 진짜로 놀란 것은 해원이다.

‘뭐지? 전부 있었던 일이라는 걸까? 그건 꿈에서 들은 건데?’

꿈 속의 사내 무랑군이 그의 일이라며 말해준 이야기들을 지금 유모는 전부 사실처럼 대답하고 있다.

‘만약 그게 정말 있었던 일이라면 무랑군도 어딘가에서 살고 있는 진짜 사람인 걸까? 하지만 진짜 사람이 어떻게 내 꿈 속에 나타날 수 있지?’

만약 현실에서 들었던 이야기라거나, 무랑군을 어딘가에서 잠깐 봤는데 자신이 기억을 못하는 것이라면 꿈에서라도 나오는 것이 이해가 가지만 전혀 그런 기억은 없다.

해원의 머릿속이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마마께서 갓난 아기셨을 때, 그러니까 폐하께서 막 이곳 북연을 정복하셨을 때 이 황궁의 서쪽에 북악신의 신당이 있었답니다.”

“황궁의 서쪽이라면, 별당 쪽인데...”

“네, 마마. 별당이 있던 자리에 예전에는 신당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데?”

“아이고, 마마. 이건 정말 어디 가서 정말 아는 티도 내시면 안 됩니다. 마마께 말씀드렸다는 걸 폐하께서 아시면 저는 목이 달아납니다.”

“알고 있어. 입은 꾹 다물고 있을게. 나만 알고 있을게, 정말로.”

해원이 두 번 세 번 약속을 하자 그제야 유모가 불안한 눈으로 말을 시작했다.

“북악신의 신당이 있었는데 폐하께서는 북연의 백성들이 폐하를 따르지 않고 북악신을 따른다 하여 북악신의 신당에 불을 지르셨습니다.”

“아바마마께서...”

“그런데 그때 북악신을 섬기던 신녀가 불 타는 신당 안으로 뛰어들어가서 불길 속에서 타죽는 일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듣는 것만으로도 너무 끔찍해서 해원이 할 말을 잃었다.

“너무 끔찍해...”

정말 그때 불에 타죽은 신녀의 아들이 무랑군인 것일까. 무랑군은 실제 존재하는 것일까.

“혹시 그 신녀에게 아들이 있었는지 알고 있어?”

“그건 모릅니다. 제가 거기까지 어떻게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유모의 표정이 어둡고 불안하다.

꼭 아직 할 말이 남아있는데 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유모가 제 시선을 피하는 것을 해원도 느꼈다.

“유모. 그때 무슨 일이 또 있었어?”

“다, 다, 다른 일은 없었습니다.”

“거짓말 하지 마. 있었잖아. 그때 또 무슨 일이 있었어?”

그때 있었던 일에 대해서 전부 알고 싶다.

그걸 전부 알면 무랑군을 찾아낼 수 있을 것만 같아서 해원이 집요하게 물었다.

“마마...이것까지 말씀드리면 저는 정말 죽습니다...”

유모가 울먹였지만 해원은 반드시 들어야 했다.

“비밀을 지킨다니까. 그러니까 말해 봐. 그때 무슨 일이 있었어?”

“마마...”

울먹이다 못해서 손톱까지 씹으며 불안해하던 유모가 결국에는 포기했는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날 저는 그 자리에 없었지만 그 자리에 있었던 병사의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무슨 말이었어?”

“그러니까...그 신녀가 불길 속으로 뛰어 들기 전에 저주를 퍼부었는데...”

“저주...”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누구에게? 아바마마에게?”

“네, 마마...”

불길함은 점점 형체를 갖추고 해원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려 하고 있었다.

“그 신녀가, 저도 전해 들은 거라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 신녀가 폐하께 저주를 퍼부었는데 태어날 공주님께 내리는 저주였습니다.”

“나에게 내리는...저주...”

“태어날 딸이 평생 음란한 몸을 가지고 음탕한 창녀처럼 사내들에게 가랑이를 벌리며 살아가게 될 거라는 저주였습니다. 마마, 절대 비밀이옵니다!”

“음란한 몸의 저주...”

해원이 하도 기가 막혀 다른 말은 할 수도 없었다.

“정말, 저주였구나...”

그래서 부왕은 제 몸에 일어나는 일을 봤을 때 바로 [저주]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병이라고 의심도 하지 않고 이미 저주라는 것을 알아차렸던 거다.

그리고 제 몸에 일어나고 있는 이 끔찍한 저주는 부왕에게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그러나 지금에 와서 그 저주가 왜 시작되었는지 중요한 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저주를 퍼 부운 이가 무랑군의 어머니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정말 그때 타죽은 신녀가 무랑군의 어머니라면, 그의 어머니가 내린 저주에 자신이 걸려 있고, 무랑군의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자신의 부왕이다.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이란 말인가.

‘어떻게 해...’

해원의 눈시울이 젖어 들었다.

결국 그 사내를 혼자 버려지게 만든 것은 자신의 부왕이다.

그 사내가 지금까지 쓸쓸하게 살아가게 만든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아비다.

‘어쩌면 그는 그때 죽었을지도...죽은 넋이 내 꿈에 나타나는 것일 수도 있어...’

그는 꿈 속의 존재가 아니라 실제로 이 땅에 살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도 살아있다는 확신은 없다.

어쩌면 오래 전에 죽어 넋만 남아 있다가 그 별당에 자신이 머무를 때 자신의 꿈이 그 넋이 흘러들어온 것일 수도 있다.

자신이 그 대나무 숲에서 만났던 것은 오래 전에 죽은 무랑군의 넋일 수도 있다.

그때 여섯 살이었다고 했다.

어머니를 잃은 여섯 살의 아이가 혼자서 이곳저곳을 떠돌았다고 했다.

살 수 있었을까.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꿈에 나타날 수가 없다.

죽은 이의 넋이라서, 하필이면 그 별궁이라서, 그 대나무 숲에 떠돌고 있던 넋이 자신의 꿈으로 스며들어와 자신을 만났을 것이다.

얼마나 원통했으면, 얼마나 서러웠으면, 얼마나 외로웠으면 자신의 꿈에 들어왔을까.

“마마? 마마, 왜 눈물을 흘리세요? 마마, 소인이 말을 잘못했습니다. 그건 그냥 사람들이 제멋대로 지어낸 말일지도 모르는데...”

갑자기 해원이 눈물을 뚝뚝 흘리자 당황한 유모가 소매로 해원의 눈물을 닦느라 허둥거렸다.

“마마. 울지 마세요. 제발 울지 마세요. 제가 잘못했으니까 제발...”

유모가 잘못한 것은 없다.

사실 해원은 이게 누구의 잘못인지 잘 알지 못한다.

열 여섯 살 이후로는 부왕과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거의 없다.

열 여섯 살, 이 증상이 나타나기 전까지 부왕은 저를 끔찍할 정도로 아껴주는 아버지였었다.

자신이 유일한 자식이라서 더 사랑을 받는다는 것을 해원도 알고 있다.

부왕에게는 후궁들이 많다.

해원에게 있어서는 계모이지만 황후도 있고 후궁들만 하더라도 백여명이 넘는다.

부왕이 여색을 밝혀 후궁들을 많이 들인 것도 있지만 후궁들을 그렇게까지 많이 들인 이면에는 아들을 보기 위한 이유도 있다는 걸 해원도 모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부왕에게 문제가 있는 것인지 그렇게 많은 후궁들을 들였어도 자신을 제외한 다른 자식은 태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은 이 황궁의 유일한 공주인 동시에 단 한 명의 후계자다.

자신의 배필을 부왕이 쉽게 정하지 못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리라.

자신과 혼인한다는 것은 곧 남월의 황위를 이어받는다는 뜻이다.

아무 사내나 고를 수 없는 이유가 부왕에게는 있다.

가끔 해원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부왕에게 있어서 자신은 어떤 존재일까.

후사를 잇기 위한 그저 핏줄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면 달갑지 않은 저주를 품은 보기 싫은 딸인 것일까.

열 여섯 살 이전에 보여주었던 애정은 이제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그날 그 두려움을 보이던 표정 이후로 부왕은 더는 자신에게 다정하지 않다.

형식적인 안부만 물어오고 아주 가끔 거리를 지켜가며 제 얼굴을 확인할 뿐이다.

6년이라는 시간 동안 자신은 이 넓고 화려한 황궁에서 혼자였다.

무수하게 많은 이들이 있지만 자신은 항상 혼자였었다.

그러나 그 대나무 숲에서는 그 사내가 제 곁에 있어줬다.

무랑군.

그는 자신을 똑바로 봐줬고 이야기를 들어줬었고 또 진심으로 저를 염려해줬었다.

비로소 사람을 만난 기분이었다.

“흑...흑...”

해원은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유모의 말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라 그 사내가 보고 싶어서 눈물이 났다.

어젯밤 꿈에서 만났는데 벌써 그 사내가 보고 싶어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

처마에서 빗물이 멈추지 않고 떨어졌다.

장마가 시작되었다. 날이 유난히 무덥더니 어제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창가에 앉은 해원이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대나무 숲에도 비가 내리겠지...’

그 별궁에서 돌아온 지 스무날이 지났다.

그 후로는 무랑군의 꿈을 꾸지 않았다.

밤에 잠이 들 때마다 꿈을 꾸기를 간절히 바랬지만 그는 꿈에 나오지 않았다.

바람이 부는 대나무 숲의 꿈은 꿨었다.

그러나 꿈 속의 그 대나무 숲에 무랑군은 없었다.

그가 없는 대나무 숲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열 흘이 지나고 스무날이 지난 오늘까지 해원이 한 일이라고는 창밖을 바라보는 것 밖에 없었다.

딱히 이전과 달라진 것은 없다.

이전에도 공주궁 안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었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변한 것이 있다.

마음에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대나무 숲에 불던 바람이 지금은 마음에서 불고 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가슴이 일렁거린다.

“마마! 마마!”

그때 호들갑을 떨며 유모가 뛰어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마마! 폐하께서 마마를 부르십니다!”

“나를?”

뜻밖의 말에 놀란 해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까지 부왕이 저를 부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자신에게 해야 할 말이 있으면 부왕이 직접 이곳으로 왔지 공주궁 밖으로 부르지는 않았다.

“이곳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나더러 오라 하셨어?”

“네, 마마!”

“잠시만, 내가 지금 엉망이라...”

밖으로 나갈 일이 없어서 아침에 일어나 야장의만 몸에 걸치고 있다.

그러니까 이 꼴로는 부왕을 만나러 갈 수가 없다.

해원이 나름대로 단장을 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황제의 부름에 시간을 오래 지체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비가 그치지 않아 유모가 받쳐주는 큰 우산을 쓰고 해원이 공주궁을 벗어났다.

해원이 지난 6년 동안 황궁 안에서 다녀본 곳은 공주궁과 별궁 밖에 없다.

그 이외의 황궁 안에는 가본 적이 없다. 가볼 수도 없었다.

‘많이 변했구나...’

황궁은 6년이라는 시간 동안 많이 변했다. 자신이 알고 있던 길이 사라지고 기억하고 있던 지붕은 모양이 변했다.

사실 부왕이 있는 어룡전까지 가는 걸음이 그렇게 편하지만은 않다.

지금 해원이 유난히 신경쓰이는 것은 곳곳에 서 있는 병사들이었다.

자신이 가까이 스쳐 지나가기만 해도 병사들이 저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저 시선을 안다. 음욕어린 시선들.

아직 발정기도 아니고 자신의 몸에서 나는 단내는 많이 옅어져 있다.

그런데도 가까이에서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병사들은 제게 음욕을 느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불편해...’

너무 오래 갇혀 살아서 다른 사람들, 특히 사내들의 반응이 어떨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던 것이 문제였다.

좀 나아졌다고 생각했던 건 착각이었다.

자신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고 발정기가 오면 주변 사내들을 전부 흔들어 놓을 것이 분명하다.

그나마 환관들은 병사들보다는 나았다.

환관들은 괜찮다는 것이 아니라 병사들보다는 나았다는 뜻이다.

“마마. 조금만 천천히 걸으세요. 빗물에 옷이 전부 다 젖습니다.”

해원의 걸음이 빨라져서 우산을 받쳐주던 유모가 난색을 표했지만 해원은 걸음을 더 서둘렀다.

빨리 병사들이나 환관들이 있는 곳을 지나치고 싶었기 때문이다.

6년 만에 발을 들여놓는 황궁은 위압감이 들 정도로 화려했다.

‘이곳이 원래 이랬었나...’

6년 전에는 이곳이 이렇게 위압감을 줄 정도로 화려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황금을 지붕에 입혔구나...’

위압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황금이다.

6년 전에는 지붕은 붉은 색의 기와였었다. 그러나 지금은 지붕 전체가 황금으로 뒤덮였다.

‘이렇게까지 하다니...’

부왕이 그의 권위를 드러내거나 그의 부를 과시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걸 해원도 안다.

황궁 안에 이미 부왕의 황금 동상이 해원이 알고 있는 것만 여섯 개가 세워져 있다.

아마 지금은 그 수가 더 늘지 않았을까.

지붕만 황금이 아니라 층계도 황금으로 덧입혀졌고 기둥들 역시 황금이었다.

‘저 많은 황금들을 대체 어디에서 가져오는 것일까...’

부왕의 나라 남월은 거대한 제국이다.

예전에는 여러개의 나라들이었지만 지금은 남월에 흡수되었다.

그리고 부친은 옛 남월의 땅에서 이곳 옛 북여의 땅으로 도읍을 옮겨왔다.

해원은 아직 남월에 가본 적이 없다.

자신은 남월에서 태어났다고 들었다. 그러니까 옛 남월의 땅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어떻게 보면 그곳은 고향이지만 해원은 가본 적이 없다.

가고 싶다는 생각은 늘 가지고 있었지만 혼자서는 갈 수도 없고, 무엇보다 자신은 황궁에서, 공주궁에서 허락이 없이는 단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다.

그 먼 곳까지의 여행을 부왕은 절대로 허락해주지 않을 것이다.

“얼굴이 좋아 보이는구나.”

“네, 아바마마.”

부왕의 앞에 앉은 해원이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마지막으로 부왕의 얼굴을 본 것이 석달 전이다.

그때 공주궁 앞을 지나가다가 잠시 들렀다며 부왕은 [네 배필을 알아보는 중이다]라는 꺼냈던 것이 부왕을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다.

“너를 부른 것은 이제 너도 슬슬 배필을 맞이해야 할 것 같아서란다”

“네, 아바마마.”

이 말은 3년 전부터 들어왔다.

그러나 부왕의 욕심에 걸맞는 사내를 찾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이런 자신이라도 아내로 맞이하고 싶다는 사내가 나타나지 않은 것인지 운만 띄울 뿐 정작 혼인할 사내는 나타나지 않았다.

‘오늘도 그냥 이런 말씀이나 하려고 부르신 걸까...’

해원이 살짝 실망할 때였다.

“좋은 사내를 찾아냈단다.”

그 말에 해원이 놀라 황제를 쳐다봤다.

“네?”

“부마감을 찾았단다. 서두를 것 없으니 천천히 혼례를 준비해서 겨울이 오기 전에 국혼을 치르고 부마를 맞이하면 나도 마음이 조금 놓이겠구나.”

“어떤 분이신지...”

“남녕 태수의 아들이다. 지금 남녕을 출발해서 이곳으로 오고 있으니 닷새 정도면 도착할 것이다.”

남녕은 옛 남월의 도읍이다.

부왕은 아마 심사숙고했을 것이다.

부마는 곧 차기 황제다.

옛 북연의 피가 흐르는 귀족 가문에는 절대로 후계를 넘겨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고르고 고른 것이 옛 남월의 도읍인 남녕 출신의 귀족 자제이다.

“닷새 후면 제가 별궁에 들어가는 날과 겹칠 것 같사옵니다.”

“그래서 더 잘 된 것 아니냐?”

“네?”

“어차피 국혼을 올리고 부부가 될 터. 그가 이곳에 도착하면 네가 있는 별궁으로 보내마. 네가 별궁에서 나올 때까지 내내 같이 있어도 되겠지.”

해원이 차마 [네]라는 대답을 못했다.

부왕의 말이 맞다. 어차피 부부가 될 사내다.

자신의 달거리에 맞춰서 그 사내가 자신과 함께 별궁에 들어가면 볼 것도 없이 닷새 동안 별궁에 있는 내내 짐승처럼 들러붙어서 떨어지지 않고 교접을 할 것이 분명하다.

자신은 닷새 동안 계속해서 단내를 풍겨댈 것이고 그 단내에 취한 사내는 하루 종일, 그리고 밤낮으로 제게 흥분하여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는 별궁에 이불 두 채를 가져다 놓으라 해야겠구나.”

“네...”

해원이 힘없이 대답하며 황제를 쳐다봤다.

그 때 황제와 해원의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해원이 이상함을 느꼈다. 부친의 눈빛이 묘했다.

저 눈빛을 해원은 안다. 저건 자신의 단내에 취한 사내들이 짓는 눈빛이다.

‘아직 발정기도 아닌데...’

물론 그렇다고 해도 몸에서 옅게 단내를 풍기기는 하지만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킬 정도는 아니다.

사리분간을 못하고 흥분에 무너지게 할 정도의 단내는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왜 부왕은 저런 눈빛을 짓는 걸까.

‘내가 잘못 본 것일까...’

“이리 가까이 와보아라.”

부왕이 제게 손짓하자 해원의 속에서 거부감이 일어났다. 가까이 다가가기 싫다.

하지만 부왕이 부르는데 가까이 가지 않으면 분명 역정을 낼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해원이 황제의 가까이 다가갔다.

“많이 컸구나.”

황제가 손을 뻗어 해원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갈수록 죽은 네 어미를 닮아가는구나.”

해원은 자신이 죽은 모친을 닮았는지 어떤 건지 잘 모른다. 모친의 초상화 한 장 없기 때문이다.

‘기분 나빠...’

하지만 지금의 손길은 무척이나 기분이 나쁘다. 이상할 정도로 기분이 나빠 전신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

“유모.”

공주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해원이 유모에게 물었다.

“네, 마마.”

어느새 비는 그쳐 있었다.

그래봤자 잠깐 그친 것에 불과하다.

장마의 시작이니 이제 앞으로 한 달 가량 더 비가 내릴 것이다.

“내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어?”

지금까지 어머니에 대해 물은 적도 없고 부왕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오늘 문득 어머니에 대해 궁금해졌다.

“유모는 남녕 사람이잖아. 그렇지? 어머니가 나를 낳다 돌아가신 후에 유모가 날 데리고 아바마마께 왔다고 들었어.”

“그렇습니다, 마마.”

“그러니까 유모는 내 어머니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건...”

“말해줘. 아무도 내게 어머니에 대해 말해주지 않아. 누구도. 나는 내 외가가 어딘지도, 외가가 있는지 없는지도, 사촌들이나 다른 핏줄이 있는지 없는지도 몰라.”

혼자가 된 느낌이라는 게 이런 걸까.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나는 이곳 저곳을 떠돌았지. 어디에도 내가 속할 곳은 없었고 나를 반겨주는 곳도 없었고...실은 핑계지만 내가 더는 사람들을 믿지 못하게 되었지.]

그 사내도 이런 기분이었겠지. 혼자라는 건 이런 느낌이었을 것이다.

부왕은 낯설고 어머니는 얼굴도 모르고 다른 핏줄에 대해서는 모른다.

형제도 없고 자매도 없다.

지금까지는 이런 것이 외롭고 쓸쓸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지만 지금은 선명한 외로움을 느낀다.

이건 전부 그 사내 때문이다.

다정함을 가르쳐준 그 사내가 없어서 비로소 외로워졌기 때문이리라.

“마마...”

“지금 말고 돌아가서 알려줘. 남들이 들으면 안 되는 비밀일 테니까.”

해원도 눈치라는 것이 있다.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누구도 해주지 않는다는 건 그게 금기라는 뜻이다.

자신의 출생을 누구도 입에 담지 않는다.

자신이 하늘에서 떨어졌거나, 아니면 부왕이 직접 낳지 않은 이상 어머니가 있고, 어머니를 이 세상에 있게 한 외조부와 외조모가 있을 텐데 그것들은 전부 금기가 되었다.

건드리면 안 되는 무서운 비밀처럼 되었다.

“나는 꼭 들어야겠어.”

이미 해원은 결심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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