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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그날부터-4

그날부터-4

 

대학생 30일 무이자 대출. 전화 한 통이면 대출 가능.

생동성 실험 피험자를 모집합니다. 참가 자격: 타 약물을 복용하고 있지 아니한 자.

습관처럼 대자보를 훑어보다가 시선을 멈추었다. 덕지덕지 붙어 있는 종이들 사이에서 무이자 대출, 피험자 모집이라는 글자가 눈에 띈다. 

종이 아래쪽은 전화번호를 적어 놓고 뜯어 가기 쉽게 듬성듬성 가위로 오려 놓았다.

무이자 대출. 진짜일까? 어쩐지 미심쩍다. 그래도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생동성 실험에 적힌 약물은 처음 들어 보는 생소한 이름이었다. 한 달만 할 건데 문제가 되려나.

일단 자취방 보증금 정도가 필요했다. 작년에 대출 이자가 연체된 이후로 추가 대출은 어려웠다. 대부 업체에까지 손대고 싶진 않았다.

이런 동네에 살다 보면 막다른 골목에 몰려 사채를 쓰고, 주기적으로 들이닥치는 사채업자들에게 시달리는 사람을 여럿 보게 된다. 

그들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이자를 갚기 위해 또 다른 사채를 쓰는 악순환에 빠져 결국은 신용 불량자가 되었다.

손을 뻗었지만 둘 중에 어느 전화번호를 뜯어야 할지 쉽게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허공에 멈춰 선 손은 결국 전화번호 두 개를 모두 뜯어냈다.

종이를 접어서 가방 속에 집어넣는데 누군가 내 팔목을 거세게 틀어쥐었다. 놀라서 고개를 드니 서슬 퍼런 눈빛의 정지헌과 마주쳤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뭐야, 놀랐잖아.”

그의 손을 털어 내고 어깨를 으쓱였다.

“아르바이트 전단지를 왜 뜯겠어. 돈 벌려고 그러지.”

“아르바이트? 저걸 한다고?”

지헌은 기가 막힌 얼굴로 생동성 실험 모집 공고문을 가리켰다.

“아직 결정한 건 아니야. 생각 중이야.”

“내가 있는데, 네가 왜 이런 걸 해.”

학교 오는 버스 안에서 휴대 전화는 내내 울렸다. 

나는 어젯밤 이후로 줄곧 정지헌의 전화를 무시했다. 정지헌도 나의 선 긋기를 느낀 듯했다. 그러니 더 노기 어린 기색으로 나를 다그치는 거겠지.

지헌은 가방 속에 넣은 전화번호 종이를 억지로 꺼내서 박박 찢어 바닥에 버렸다. 지헌이 하는 짓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너 나한테 이러는 거, 월권이라고 생각 안 해?”

“이게 왜 월권이야? 우리 서로 자위해 주는 사이라며? 그게 어디 보통 사이인가.”

이렇게 저열하게 나오시겠다?

잠자리에서 농담처럼 했던 말을 굳이 밝은 햇빛 아래서 다시 꺼내며 환기한다. 하, 나는 나지막이 웃으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머리로 열이 훅 오른다.

지헌은 대자보에 붙어 있는 종이까지 거칠게 뜯어내, 나 보란 듯이 눈앞에서 찢어 버렸다.

“돈이 필요하면 나한테 진작 얘기하지 그랬어.”

그러곤 지갑에서 거침없이 카드를 꺼내 아무렇지 않게 내밀었다.

“너 과외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어. 너 자존심 강한 거 알아서 그냥 두고 봤던 거야.”

“그럼 계속 두고 보지 그랬어?”

“민감하게 나오지 마. 난 널 도와주고 싶은 것뿐이야.”

“내가 민감하다고? 너는 세상 모든 게 명확하지. 나는 안 그래. 너는 나를 몰라. 물론 나도 널 모르지. 알고 싶지도 않아. 우린 이렇게 다른데 왜 서로 같이해야 하니?”

“뭐?”

“차라리 우리 한 번 할래?”

“너 지금 뭐라고?”

“무슨 내숭이야. 네 말대로 서로 자위해 주는 사이라며? 삽입 빼고 온갖 짓은 다 해 놓고. 우리 그냥 한 번 하고 끝낼래? 나도 이대로는 너랑 찝찝해서 못 끝내겠다. 너한테 받은 게 한두 개여야지. 너도 나 그냥 보내면 두고두고 후회할걸? 아, 걔랑 한번 자 볼걸. 걔한테 투자한 돈이 얼만데. 아까워 죽겠네.”

“너 도대체 날 뭐로 보고. 지금까지 날 그렇게 보고 있었던 거야?”

하얗게 질려서 말문 막힌 정지헌은 또 처음 본다. 그 얼굴에 대고 나는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네가 나한테 왜 집착하는 줄 알아?”

“…….”

“나랑 끝까지 못 자 봐서 그래.”

그러곤 돌아서려다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아 참, 하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 할 말 있는데. 나 처음 아냐. 그래서 뺀 거 아니거든. 혹시 너 기대하고 있을까 봐.”

그 꿈이 예지몽인 모양이다. 정지헌 얼굴이 일그러졌다. 꿈속에서 본 얼굴처럼, 구겨서 바닥에 버린 종이같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어쩐지 유쾌한 웃음이 터질 것 같다.

“어! 미희다!”

멀리서 아는 얼굴들이 보였다.

“지헌이도 있네. 너희 여기서 뭐 해. 대자보에 뭐 볼 거 있어?”

가까이 다가온 다은이와 승아 언니가 대자보와 우리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지헌은 주위 시선에 아랑곳없이 여전히 내게 시선을 못 박고 서 있다. 격정에 차오른 얼굴이 금방이라도 사람들 앞에서 왈칵 감정을 쏟아 낼 것만 같다. 감정 컨트롤 못 하는 10대처럼 충동적이고 아슬아슬해 보였다.

이성적인 인간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미친놈인가. 괜히 건드렸나? 슬그머니 후회되었다.

자존심 강한 인간이라 작정하고 건드리면 알아서 떨어져 나갈 줄 알았다.

이 방법을 쓰는 게 아니었나? 이거 소문 한번 잘못 나면 두고두고 술자리 안줏거리로 회자될 텐데….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나는 지나가는 학생들을 불안하게 곁눈질하다가 승아 언니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니야. 아무것도.”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저으며 표정을 바꿔서 다은이와 승아 언니 팔을 잡고 슬금슬금 뒤로 이끌었다.

“스터디 룸 예약한 시간 다 됐지? 빨리 가자. 늦게 가면 취소되잖아.”

“지헌이는 뭐 한대? 지헌이도 공강이면 우리랑 같이 가지, 왜.”

다은이가 내게 끌려가면서 고개를 뒤로 길게 빼 정지헌을 확인했다. 나는 다급히 선수 쳐서 잘라 냈다.

“정지헌 바쁘대. 스터디 모임 있나 봐. 여기저기서 찾는 데가 많은 몸이잖아.”

그러면서 슬쩍 뒤를 확인했다. 지헌은 여전히 내게 집착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저 진상, 진짜….

무언의 눈빛으로 정지헌을 지그시 노려보고 승아 언니와 다은이 팔을 잡고 얼른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다.

갑자기 지헌이 뚜벅뚜벅 걸어와 내 어깨를 잡아 돌려세웠다.

“뭐야.”

나는 경계하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휴대 전화에 시선을 고정하고 문자를 날리던 승아 언니도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색에 흘끗 시선을 들었다.

“이거 땅에 떨어트렸잖아. 가지고 가야지.”

“…….”

지헌이 짐짓 다정한 척 웃으며 내게 카드를 내밀었다. 나는 말없이 지헌을 응시했다.

“뭐 해, 얼른 안 받고. 스터디 늦겠다.”

별일 아닌 걸 알고 승아 언니가 다시 휴대 전화에 시선을 내리며 재촉했다. 지헌은 기어코 내 손에 카드를 쥐여 주었다.

저 지긋지긋한 놈.

커다란 탁자 위에는 두꺼운 책들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다. 양손에 들기도 벅차 보이는 책들 위로 다은이가 철퍼덕 엎드렸다.

“아, 나 토할 거 같아.”

“기다려 봐, 나 뭔지 알 것 같아. 그러니까… 피고가 제소 전 사망했으니까, 그 판결은 대립 구조 간과 판결이므로….”

한껏 미간을 찌푸린 다은이 책에 눈을 고정하고 중얼거리다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러곤 좌우를 둘러보며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물음을 던졌다.

“근데 어차피 피고가 죽은 건 똑같으니까 제소 중 사망처럼 당연승계 하면 안 되나?”

“그거랑은 다르지. 이건 소장 내기 전에 죽었으니까 애초 피고가 아니었잖아. 지위가 바뀔 게 없지.”

나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다은은 혼란스러운 듯 잠시 눈을 깜박이다가 뒤늦게 깨닫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지. 깜박했다.”

엎드려 있던 승아 언니가 고개를 들고 깔깔 비웃었다.

“그건 나도 아는 거다.”

다은이 매우 유감이 많은 눈으로 빨간색 민사소송법 책을 들고 흔들었다.

“이건 학생들 보고 이해하라고 쓴 건지, 읽다가 포기하라고 쓴 건지 모르겠다. 읽다 보면 아는 것도 헷갈려.”

“교과서는 버리래도. 그거 백날 읽어 봤자 절대 이해 못 한다.”

“그래도 출제 위원인데 자기 책으로 논리 잡으면 점수 더 줄지 누가 알아.”

“그걸 끝까지 잡고 있는 네가 대단하다. 난 그 책 읽다가 열두 번도 더 집어 던지고 싶더라.”

“나도 몇 번 통독하고 참고서로 갈아타려고.”

“뭘로 갈아타게.”

“글쎄. 요새 이우철이 대세라던데?”

“이우철? 기본서나 괜찮지. 케이스는 별로더라. 좀 조잡해. 케이스 생각하면 차라리 유영오가 낫지 않아? 샘플 강의 들어 봤는데 흐름 잡는 데 좋을 것 같아.”

“기본서랑 케이스는 같은 강사로 가는 게 낫지 않아?”

이 강사는 어떻니, 저 참고서는 어떻니, 승아 언니와 다은은 한참을 강사와 참고서 이야기로 수다를 떨었다. 공부는 덜 되어 있을지언정 부수적인 지식은 많았다. 나는 귀에 소음용 마개를 꽂고 묵묵히 책장만 넘겼다.

어느 정도 결론이 났는지 다은이 문득 나에게 눈길을 던졌다.

“근데 넌 아까부터 뭘 그렇게 열심히 보고 있어? 뭐 좀 알아낸 거 있어?”

“별로.”

책에 눈을 고정하고 답했다. 시선만 책을 향할 뿐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그 말에 다은이 새된 비명을 질렀다.

“뭐어? 너도 모르면 우린 어떡하라고! 우린 너만 믿고 있었는데! 아까부터 혼자 열심히 보고 있더니, 알아낸 게 아무것도 없어?”

턱을 괴고 있던 나는 쓱 다은에게 시선을 돌렸다. 다은은 손으로 입을 막고 우리 이제 큰일 났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입에서 손 떼 봐.”

다은이 천천히 입을 가린 손을 치웠다. 양쪽 입꼬리가 올라가 있다. 다은은 겸연쩍은 듯 헤헤, 하고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제부터 같이 찾으면 되지, 뭐. 걱정 마.”

대개 스터디란 게 이렇다. 서로의 실력이 모자람을 확인하고 안도하는 것. 서로의 빈약한 답안지를 돌려 보며 나만 못 따라가는 게 아니구나, 나만 허덕이는 게 아니구나, 안심하는 용도였다.

한번은 두세 시간 넘게 열띠게 토론해 놓고, 나중에 알고 보니 엉뚱한 결론을 내린 적도 있었다. 고만고만한 실력이 모여서 토론해 봤자 내리는 결론 역시 고만고만할 뿐.

그래도 이렇게 토론하면서 깊이 생각해 본 경험이 실전에서 힘을 발휘한다고 교수님들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얘기한다. 다들 그렇다고 하니 그냥 그런 줄 알고 따라가는 수밖에.

“앗, 우리 자기 근처에 왔대. 나 잠깐 나갔다 올게.”

급히 손거울로 얼굴을 확인한 승아 언니가 발그레 상기된 얼굴로 총총 뛰어나갔다. 그 모습을 다은이 부러움 섞인 눈으로 바라보았다.

“승아 언니 예쁘지.”

“응, 언니 예쁘지.”

나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맞장구쳤다. 다은이 한숨을 내쉬었다.

“부럽다. 나도 저렇게 예쁘게 연애하고 싶다. 밤샘한다고 야식 사다 주고, 잠깐 10분 얼굴 보려고 멀리서 달려오고, 어디서든지 언니 아프다고 하면 급히 뛰어오고.”

책장을 넘기던 나는 멈칫했다. 다은이 말이 마음에 걸렸다.

중도에서 공부하는 내 얼굴을 잠깐 보려고 주말, 그 먼 본가에서 밤늦게 달려오고, 밤샘할 때 초밥이나 도시락을 사다 날라 주고, 감기 기운이 있으면 꼭 들러서 죽과 약을 전해 주고,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눈여겨봐 뒀다가 기념일에 부득불 손에 쥐여 주고, 도와 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자기 마음대로 새벽에 급히 리포트 써서 보내 주고, 돈이고 시간이고 길바닥에 마구 버리고 다니는 게 연애라고?

아니, 그렇지 않다. 나는 강하게 부정했다. 승아 언니와 나는 경우가 다르다.

밤늦게 달려온 정지헌은 자동차를 으슥한 곳에 대어 놓고 나를 불러들였고, 굶어서 비실거리니 일단 먹여 놓고 자신의 욕구를 채웠으며, 아플 때는 약이고 죽이고 사다 날라 지극정성 챙겨 주더니 차도가 보이면 금방 달려들었다. 그러곤 서브 노트를 미끼로 마음대로 나를 쥐고 흔들었지.

나는 정지헌을 비난하는 게 아니다. 우리 관계는 좀 더 합리적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뿐. 나는 그의 모든 행동을 기꺼이 용인했고, 심지어 내 쪽에서 더 적극적으로 응할 때도 있었다. 지헌은 정보력 면에서 나보다 우위였고 나는 그가 절실했다.

그리고 지헌은 누구라도 매력을 느낄 정도로 잘생겼다. 성적으로 끌리지 않을 이유가 없다. 우리는 순간에 충실한 것뿐이다.

연애란 좀 더 달콤하고 부드럽고 따스한 느낌이 들지 않을까? 나는 막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이렇게 삭막하고 충동적이고 자극적이고 계산적인 관계가 연애일 리 없다. 사랑일 리 없다.

찜찜한 마음을 털어 내고 마음을 다잡았다.

“연애하면 되지. 그게 뭐 어려운 거라고.”

“미희, 넌? 넌 왜 남자 친구가 없어? 대학 와서 계속 솔로였지?”

“아니. 짧게 만난 상대는… 있었어.”

내 입에서 나온 말은 과거형이었다. 다은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진짜? 언제?”

“예전에. 넌 아마 모를 거야.”

“너도 사귄 사람 있었구나. 난 네가 남자 싫어하는 줄 알았어. 너 약간 음, 잘생긴 애들이 너 따라다녀도 관심 없어 했잖아.”

“잘생긴 애? 누구?”

의아해서 묻는 말에 다은이 열심히 설명했다.

“왜 전에 학교 정류장에서 너 연예인인 줄 알고 사인해 달라고 따라왔던 남자애 있잖아. 그리고 너랑 같이 미술사 교양 들었던 신입생. 걔도 귀엽지 않았어?”

“글쎄. 난 별로던데. 내 타입은 아니었어.”

“그러니까 네 타입인 남자가 궁금해. 어떤 남자였어?”

“돈 많고 잘생기고 키도 크고 아, 몸도 좋더라.”

“그럼 끝까지 잡았어야지.”

“딱히 마음이 가질 않더라. 그냥 심심풀이 땅콩이었어.”

앙큼하게 다은이 앞에서 정지헌을 타인처럼 말하고 있었다. 어차피 정지헌이라고 밝히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테니까. 그냥 이렇게라도 말해서 찜찜한 마음을 털어 버리고 싶었다.

“와, 너 되게 세다.”

“사귄 것도 아냐. 그냥 잠깐 만나고 헤어진 거야.”

“그래도 너랑 이런 이야기 하니까 좋다. 미희 넌 항상 네 이야기를 잘 안 하니까. 좀 많이 궁금했거든.”

“딱히 말할 것도 없어. 내 동선 단순한 거 너도 알잖아.”

“그럼 헤어진 건 최근이야?”

“근데 너 쟁점 다 찾았어?”

작성 중인 서브로 말을 돌렸다. 다은이는 이제 생각났다는 듯 노트북을 쳐다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니. 하다 막혔어. 더 이상은 무리야.”

서로 분량을 정해 서브 노트를 작성하고 작성한 것을 돌려 보는 중이었다. 다은은 자기 몫의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고 중간에 막혀서 끙끙거렸다. 나는 다은이 노트북을 끌어왔다.

“이리 줘 봐. 내가 해 볼게.”

“고마워. 근데 내 파트가 제일 어려운 거 같지 않아?”

“그럼 나랑 바꿀래?”

“아니. 그건 아니고. 솔직히 미희 네 파트가 제일 어렵긴 해. 난 손도 못 대겠더라.”

다은이 헤헤 웃으며 지갑을 들고 일어났다.

“나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올게. 올 때 음료수 사 올게. 넌 맨날 먹는 밀크 티 맞지?”

“응, 고마워.”

정지헌과 어울려 다니면서 언제나 도움받는 포지션이어서 잊고 있었는데, 사실은 나도 동기들 사이에서는 꽤 잘하는 편이었다. 수재인 정지헌 옆에서는 언제나 내가 부족한 것 같았고, 자괴감이 들었다. 그런데 나와 비슷한 동기들과 어울리니까 확실히 마음이 편했다. 진작 그 인간을 끊어 내는 거였는데.

좀 더 명료해진 마음으로 타탁, 하고 노트북을 두드렸다. 그러다 손을 멈칫했다.

“이게… 뭐….”

노트북 화면 가득 정지헌 얼굴이 떠올랐다.

순간, 내가 정지헌 사진을 찍은 적이 있던가 이게 왜 여기 있는 거지, 착각하고 의아했다. 그러다 깨달았다. 이 노트북은 다은이 거였다.

커서를 잘못 건드린 모양인지 사진은 차례로 지나갔다.

체육 대회 때 과티를 입고 밝게 웃고 있는 모습, 중도 앞 잔디밭에서 친구들과 찍은 모습, 축제 때 주점에서 우연히 찍힌 모습, 머리 스타일의 변화가 담겨 있는 거로 보아 꽤 오래전부터 모은 듯싶었다.

“중도 편의점 문 닫아서 경영대까지 갔다 왔어. 자, 여기….”

봉투에서 음료수를 꺼내며 들어오던 다은이 말을 멈추었다. 시선은 노트북 화면을 향하고 있다.

“…….”

나는 아연해서 다은을 돌아보았다. 빠르게 다가온 다은이 빨개진 얼굴로 쾅! 노트북 뚜껑을 덮었다. 인맥 넓은 다은이는 오은성과도 친분이 있었다. 그럼 지헌이 오은성과 사귈 때부터 좋아했다는 말인데… 맙소사.

“…….”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나는 뭔가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조금 후에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너… 정지헌 좋아해?”

“…어.”

“왜?”

“어? 왜긴… 그야….”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었는지 다은이 말을 더듬었다. 나는 다은이 쪽으로 몸을 틀고 안타깝게 붙잡았다.

“오래된 거야?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정지헌이 오은성과 사귀면서 너한테 집적댄 거지?”

“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아니긴. 네가 괜히 좋아할 리 없겠지. 걔가 먼저 여지를 준 거지? 정지헌 걔, 내가 보기에 별로야. 여자 아쉬울 것 없고 성격도 음흉해 보여. 그런 앨 왜 좋아해? 걔랑 사귀기에는 네가 너무 아까워”

“뭐?”

“잘난 척 심하고 여자 알기 우습게 알고. 그런 앤 여자 그냥 자기 소유물로 봐. 그런 애들이 한번 여자한테 집착하면 장난 아니….”

“야, 야!”

잠자코 내 말을 듣고 있던 다은이 다급히 내 말을 막았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렇게 얌전한 척하는 애들이 더 여자 밝히고 음흉한 거 알지? 난 정지헌 별로더라.”

말을 하다가 문득 이상한 느낌에 뒤를 돌아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의 정지헌과 같은 과 선배들, 그리고 승아 언니가 놀란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

나는 급히 입술을 사리물었다. 중간에 선 다은도 하얗게 질린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했다. 불시에 뒷담화하는 현장을 생중계로 목격한 선배들은 얼떨떨한 웃음을 흘렸다.

“하하, 거참.”

“야, 미희가 지헌이 많이 싫어했나 보다.”

“지헌이가 그렇게 싫었어?”

스터디 룸 입구에 선 그들은 하나둘 안으로 들어오며 얼어붙은 분위기를 깨고 한마디씩 입을 열었다.

“지헌이가 미희한테 뭐 큰 잘못 했나 보네. 근데 지헌이가 그럴 애가 아닌데. 크게 미움받을 애가 아닌데. 왜 그렇게 지헌이를 싫어해. 너 너무 대놓고 욕하더라.”

“그리고 너 잘못 알고 있는 거야. 지헌이 바람둥이 아냐. 여자애들이 혼자 좋다고 난리 친 거지, 지헌이는 받아 준 적 없어.”

“그래. 내 사촌이라서가 아니라 지헌이 그런 애 아냐. 미희 네가 뭔가 오해가 있었나 보다.”

승아 언니까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언니는 나와도 친분이 있고 정지헌은 사촌이니 중간에서 입장이 난처해 보였다.

정작 당사자들은 입을 꾹 다물고 있는데 제삼자들이 어색하고 민망한 분위기를 풀어 보겠다고 떠들어 댔다. 몰랐는데, 정지헌 대변자들이 참 많았다. 그들은 정지헌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내게 알리지 못해 난리였다.

“지헌이 진짜 미희한테 단단히 미움받고 있나 봐.”

“지헌이가 그렇게 싫어?”

“야, 미희가 지헌이 욕했다며!”

스터디 룸으로 고개만 불쑥 내밀고 크게 소리치고 가는 선배도 있었다. 그는 황망한 내 얼굴을 보더니 대답도 듣지 않고 히죽 웃으며 사라졌다.

일부러 사람을 난처하게 만들고 즐기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휴게실에서 담배 피우고 있던 고학번 선배들도 어슬렁거리며 스터디 룸으로 기어들어 와 한마디씩 훈계하고 사라졌다.

다들 건수 하나 잡았다. 공부만 해서 생활이 무료해서 그런가, 요리조리 씹고 맛볼 수 있는 훌륭한 안줏거리를 놓치지 않았다.

나는 졸지에 당사자를 앞에 두고 뒷말하다 걸린 대담무쌍한 소문의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그것도 무려 법대 최고 인기남 정지헌을 두고 말이다.

그러는 동안 나는 한마디 말도 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황망한 마음에 말문이 막혔고, 그다음에는 연이어 터진 사건들로 정신이 없었다. 수습을 생각하기도 전에 사람들이 정신없이 말을 쏟아 냈다.

다은이는 사람들 눈치를 살피며 침묵을 지켰다. 다른 것보다도 자신의 비밀이 탄로 날까 전전긍긍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상황에 정지헌까지 신경 쓸 틈은 없었다. 구석에 조용히 서 있던 정지헌은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나는 긴장한 얼굴로 정지헌을 보았다. 나야 뒷말하다 걸렸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고, 내내 조용히 있던 정지헌이 움직이니 사람들 시선이 집중됐다.

뭐 어떡하려고.

불안한 눈으로 지헌을 응시했다. 가까이 다가온 지헌은 내 의자 등판을 짚고 상체를 수그려 다정히 눈을 맞추었다.

“그러게요. 미희한테 단단히 미움받고 있네요. 앞으로 잘해 줘야겠어요.”

그러면서 사람들 보란 듯이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내가 흠칫 놀라 몸을 피하자, 미소를 잃지 않으며 단단한 팔에 지그시 힘을 줘서 가까이 끌어당겼다.

나는 몸을 피하고, 정지헌은 움직이지 못하게 어깨를 옥죄고, 조용한 힘겨루기 끝에 결국 내가 포기했다. 싫은 걸 참아 내는 얼굴로 지헌에게 몸을 맡겼다.

“그렇게 내가 싫었어?”

정지헌은 친근한 척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무언가 의미심장한 질문이었다.

내가 뒷담화한 것, 방금 몸을 피한 ,것 그리고 그와 나의 비밀스러운 행위들. 그 모든 것을 뭉뚱그려 의미하고 있었다.

“…….”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다. 그러자 지헌은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내 등을 토닥였다.

“앞으로 내가 더 노력할게.”

이건 뭐…. 꺼져. 나는 눈으로 말했다. 지헌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저녁 먹었어? 같이 밥 먹으러 갈까?”

‘미친놈.’

소리는 안 내고 입 모양만 달싹이는데, 지헌은 알아듣고도 모르는 척 말속에 뼈를 실었다.

“왜, 나랑 밥 한번 먹는 것도 그렇게 힘들겠어?”

얼굴은 다정히 웃고 있는데 어쩐지 그악스러운 기세가 느껴졌다. 종종 지헌에게서 느껴지던 찜찜함의 본체가 뭔지 확실히 알겠다. 

자료에 눈이 멀어서 모르는 척 덮고 싶었을 뿐,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야, 미희 너무 그러지 마라. 둘이 밥 먹고 와. 좀 친해져야지.”

“그래. 왜 분위기 안 좋게 만들어.”

해프닝처럼 웃어넘기던 선배들도 이제는 약간 정색했다.

왜 지헌을 자기들과 동일시하는지 이해가 안 되지만, 졸업반인 지헌에 대한 나의 하극상을 선배들은 본인들에 대한 하극상처럼 받아들이는 듯했다.

게다가 나는 전과해서 굴러 들어온 돌멩이고 지헌은 법대 핵심 인물이다. 

지헌을 홀대하는 것은 그들도 거슬려 했다. 그들이 내게 웃어 줄 수 있는 건 더 많이 가진 자, 권력의 우위에 있는 자의 여유였다.

한마디로 귀엽게 봐줄 때 적당히 까불라는 분위기였다.

암묵적인 강요를 온몸으로 느끼며 나는 무력한 마음으로 가방을 챙겼다. 

여기 분위기도 별로지만, 지헌과도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남아서 둘만 있는 게 내키지 않았다.

최대한 미적미적 가방을 챙기다가 지헌의 재촉하는 눈빛에 결국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었다. 지헌은 도망가지 못하게 내 어깨를 감싸며 나를 밖으로 인도했다.

스터디 룸을 빠져나와 한적한 길에 이르자 지헌이 몸을 돌려 나를 마주 세웠다. 용건이 있는 얼굴이었다.

하루가 몹시 길고 피곤했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멀리 운동장에 시선을 두었다. 뽀얗게 먼지가 피어오르는 운동장에 상의를 탈의한 체대생들이 구령 소리와 함께 열 맞추어 뛰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별로였어?”

묻는 말에 지헌에게 시선을 돌렸다. 웃으며 묻는데 따지는 투는 아니었다. 나는 오히려 그의 가벼운 태도에 더 화가 났다. 그렇게 뒷담화를 했는데 왜 신경도 쓰지 않는 거지?

나한테 욕먹어도 좋다고 웃는 모습이 징그러웠다.

내게 다가온 남자들은 싫다는 내 말을 언제나 무시했다. 왜 내 의견을 존중하지 않는 걸까.

네가 그렇게 나를 싫어해 봤자야. 그래도 우리 관계에는 아무 지장이 없어. 나를 깔아뭉개는 정지헌의 여유가 느껴졌다.

“어제 왜 계속 전화 안 받았어? 걱정했잖아.”

손을 내민 지헌이 짐짓 다정한 연인처럼 내 볼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아침에 있었던 다툼과 스터디 룸에서의 사건을 자기 좋을 대로 없던 일처럼 치부하는 모습에 화가 치밀었다.

탁!

지헌의 손을 거칠게 쳐 냈다. 그제야 정지헌 얼굴에서 가식적인 웃음이 사라졌다. 미세하게 굳어진 얼굴을 보니까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장난 그만해. 난 네가 나한테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무슨 생각 하는지도 모르겠어.”

“그건 내가 할 말인데.”

손을 내린 지헌이 어깨를 으쓱였다.

“사람들 앞에서 날 갖고 노는 이유가 뭐야? 난 조용히 살고 싶은 사람이야. 시험 때문에 연애 못 한다는 것도 진심이야.”

“내가 도와준다잖아. 넌 지금처럼 내 옆에 있으면 돼. 지금 생활에서 변하는 거 하나 없어.”

“아까 애들이 물고 뜯는 거 봤지? 너랑 나 소문이라도 나 봐. 생각만 해도 골치 아파. 넌 너무 튀는 사람이고 너랑 있으면 사람들한테 주목받게 돼. 다들 뒤에서 수군거리잖아. 난 그런 거 싫어. 공부에만 신경 쓰기도 벅차. 지금 나한테는 시험이 제일 중요해.”

“그 시험, 내가 도와준다고.”

잇새로 내뱉는 서늘한 목소리. 가슴이 두근거린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을 감지하며 나는 말을 이었다.

“네가 왜 날 도와줘. 그래서 네가 얻는 게 뭐야. 더는 너한테 폐 끼치면서 살기 싫어. 너도 이제 네 공부에 전념해야지. 더구나 넌 졸업반이잖아. 언제까지 시간 낭비할 거야.”

지헌이 내 말에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진지하게 대화하다가 웃을 포인트가 아닌데 웃는 모습이 불쾌했다.

“갑자기 왜 웃어?”

“마음에도 없는 소리 그만해. 너 내 생각 따위 조금도 안 하잖아. 시험만 끝나면 나랑 상종도 안 할 작정이었으면서.”

가면을 벗은 그가 거침없이 민낯을 보였다. 이번에는 내 얼굴이 굳어졌다. 지헌이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왜, 내가 너무 정곡을 찔렀나?”

나는 다가오는 지헌을 밀어냈다.

“네가 있어서 더 수월했던 건 맞아. 근데, 난 지금까지 혼자서 잘해 왔고 앞으로도 혼자서 잘할 수 있어. 그러니까 이제 내 일에 쓸데없는 참견 마. 날 좀 내버려 두라고!”

진드기 같은 놈. 진심으로 지긋지긋했다.

두 번의 거절에 정지헌 얼굴이 차게 식었다.

“그래? 이제 내가 필요 없다면 난 어떡해야 하나. 내가 필요하게 만들어 줘야 하나.”

지헌은 순식간에 돌변해서 바닥을 내보였다.

남자들이 내게 바닥을 보인 게 처음도 아닌데 왜 배신감이 드는 걸까. 나도 모르게 지헌을 믿고 있었나 보다. 아니면 그나마 가장 오래 가면을 쓴 사람이라 끝까지 인간적일 거라 믿고 싶었든지.

“너 그거 무슨 뜻이야.”

묻는 목소리 끝이 살짝 떨렸다.

“이를테면, 내 인맥을 이용해서 너 아무 스터디에도 못 들어가게 한다든지?”

지헌이 머리를 살짝 기울였다.

“나 협박하는 거야?”

“협박이라니. 왜 그렇게 무서운 말을 해. 같이 재미있게 놀아 놓고 단물 빠진 껌 뱉듯이 이제 쓸모없어졌다고 사람 버리려고 하니까 섭섭해서 그러지.”

지헌이 상스러운 태도로 뇌까리며 한 발 내게 다가왔다. 겁먹은 티를 내고 싶지 않은데 나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섰다. 등 뒤에 벽이 느껴졌다. 

지헌은 벽 사이에 나를 가두고 질 나쁘게 웃었다. 웃는 것조차 섬뜩했다. 나는 눈만 깜빡이며 그를 보았다. 무서우면서 한편으로 분노가 차올랐다.

“자료를 미끼로 사람 갖고 노는 척이라도 하더니 이제는 거침이 없구나. 성격 더러운 놈이 성질 죽이고 그동안 내 비위 맞추느라 고생이 많았다.”

“뭐가 그렇게 두려운 건데.”

“말 똑바로 해. 두려운 게 아니라 싫은 거야.”

서로 노려보는 시선에 불꽃이 튀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마. 그냥 지금처럼 지내는 거야. 달라지는 건 없어. 난 네가 왜 그렇게 나한테 가시 세우고 경계하는지 이해를 못 하겠다. 난 무조건 네 편이야. 네 적이 아니라고. 앞으로도 내 옆에서 내 도움받고 편하게 살라는 건데, 그게 그렇게 어려워?”

지헌은 돌연 한풀 꺾인 기세로 호소했다.

사이코 같은 놈. 돌았다가 제정신이었다가. 한 가지만 해라, 한 가지만. 크게 잘못 걸려들었다는 생각만 들었다. 너무 늦은 깨달음이지만.

“내 얘기는 끝났어. 앞으로 내 일에 상관 마. 끼어들지 말라고. 넌 나보다 잃을 게 많고, 얼굴이 알려진 인물이잖아? 사람들 앞에서는 알아서 잘 처신하리라 믿는다. 이만 갈게.”

“처음 봤을 때부터 너 좋아했어!”

정지헌이 나를 벽에 가두고 소리쳤다. 떨리는 목소리에서 감정의 동요가 드러났다. 당혹스러워서 말문이 막혔다.

“그러니 계속 네 옆에 앉고 잘해 줬지. 왜 그렇게 사람 마음을 몰라줘.”

내 손을 움켜쥔 그는 손바닥에 입술을 부딪쳤다. 그러곤 눈을 치켜떠 나를 응시했다. 깊고도 집요한 시선이 부담스럽기만 했다. 그저 이 자리를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거짓말하지 마. 이제 그만하라고.”

“왜 거짓말이라고 생각해? 나 너 학원에서 처음 본 거 아냐. 겨울 방학 때 중도 4열람실에서 너 자주 봤어. 내가 너 쳐다보는 거 못 느꼈어?”

실제로 작년 겨울에 4열람실에서 살았던 건 사실이다. 호소하는 얼굴이 제법 진실해 보인다. 거짓말도 진짜 같고, 진짜도 거짓말 같고. 이제는 알 수가 없다.

“하긴 넌 전혀 모르더라. 매일 뚫어져라 봤는데 어떻게 모를 수 있지.”

나는 그에게 붙들린 손을 뿌리치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있었다.

“시험만 끝나면 다가 아냐. 거기서 또 경쟁 시작이야. 이쪽에서 성공하고 싶지? 내가 계속 도와줄게. 넌 나만 따라오면 돼. 앞으로도 잘해 주고 싶어. 정말 진심이야.”

지헌이 달콤하게 속삭이며 은근슬쩍 내 볼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흔들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나는 성공하고 싶었고 위로 올라가고 싶었다. 그러면서 의뭉스러운 정지헌에게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꼈다.

더는 뒤로 갈 곳도 없는데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심리적으로 궁지에 몰린 기분이었다. 내 앞에 버티고 선 지헌이 거대한 산처럼 느껴졌다. 실제보다 훨씬 더 거대해 보였다.

지헌의 손을 잡고 싶은 마음 반, 뿌리치고 싶은 마음 반. 그 찰나의 망설임을 지헌은 귀신같이 알아채고 여유롭게 내 볼을 쓸었다. 조금 전까지 드러난 감정의 동요는 거짓말처럼 사라진 얼굴이었다.

“걱정하지 마. 학교에는 네가 원할 때까지 계속 비밀로 해 둘게. 그동안에도 너 생각해서 조용히 있었는데 그거 하나 못 할까.”

“…….”

“국제법 수업 하나 남았지? 끝나고 시계탑으로 와.”

“내가 거길 왜 가.”

심리적으로 항복하는 기분이면서 말이 고분고분하게 나가지 않았다. 왜인지 모르겠다. 정지헌과 있으면 자꾸 기묘한 반발심이 고개를 들었다. 정지헌이 주는 건 선물이든 감정이든 뭐든 쓰레기통에 처박아서 그 잘난 낯짝이 참담히 일그러지게 하고 싶었다.

“너 밥 먹어야지. 고기 좀 먹여야겠어. 너 요새 무리해서 가뜩이나 말랐는데 더 살 빠진 것 같아. 어제도 리포트 쓴다고 밤새웠지? 그러게 내가 도와준다고 할 때 도움받았어야지. 앞으로 쓸데없는 고집 좀 부리지 마. 그래 봤자 너만 손해야.”

정지헌은 강의실에 나를 들여보내고 창밖에서 지켜보았다. 나는 착잡한 얼굴로 지헌을 보았다. 지헌은 눈이 마주치자 흡족하게 웃었다.

너는 뭐가 그렇게 좋아.

가슴이 답답해서 고개를 돌렸다. 끈덕진 시선은 수업 시간 내내 들러붙었다. 모르는 척하고 싶은데, 더는 모르는 척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될 것 같다.

올봄 지헌을 만날 때쯤 나는 많이 지쳐 있었다. 아등바등 따라가려 노력해서 그럭저럭 버티고 있었지만, 사실 심리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꽤 힘에 부쳤다.

해도 해도 공부량은 줄어들지 않았고, 난다 긴다 하는 공부에 도가 튼 고수들은 너무 많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학원 모의고사 점수는 제자리에서 뱅뱅 맴돌았다.

사각사각 글씨 쓰는 소리, 파라락 법전 넘기는 소리를 들으며 혼자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이 괴로워 모의고사 수업은 빠진 지 꽤 되었다.

학원 시험 때도 서브 노트를 베껴 쓰기 바빴다. 그런 행동이 내게 독이 된다는 것을 알면서 그 순간의 자괴감을 이기지 못하고 손은 서브 노트를 뒤적였다.

그러고도 형편없는 점수를 손에 쥐고 절망했다. 다음에 잘하면 된다고 괜찮다고 나를 다독였지만, 다음에도 잘할 것 같지 않은 두려움이 엄습했다.

이게 내 한계인가 싶었다. 터지는 울음을 목 안으로 꾹꾹 참고 사는 기분이었다. 노력하면 다 괜찮아질 거라고, 더는 힘내는 것도 지쳤다.

공부도 해야 하고, 돈도 벌어야 하고, 시간은 없고, 잠은 부족하고…. 점점 얇은 자습서로 갈아탔다. 고시생들이 망해 가는 정석이었다. 포기하고 싶은데 포기할 수도 없고, 포기해서도 안 될 것 같고, 이도 저도 아닌 상태로 제자리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나타난 지헌은 내게 구세주였다. 나는 지헌의 도움이 절실했다. 나는 살고 싶었고 위로 올라가고 싶었고 성공하고 싶었다. 그 절실함이 내 눈을 가로막았다.

그래서 지헌의 본심을 어렴풋이 눈치챘으면서 모르는 척했다. 모르는 척하고 싶었다. 내가 서브 노트 보여 달라고 한 것도 아니니까. 너는 쿨하니까. 그래도 애는 착하니까. 그리고 나도 지헌에게 어느 정도의 대가는 제공하니까.

모든 게 훌륭한 핑곗거리가 되어 주었다. 정지헌 앞에서는 혼자서 잘할 수 있다고 큰소리쳤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이 지경인데도 정지헌이 내게 마음이 있으니 앞으로 계속 도움받을 수 있겠구나, 나는 살아남을 수 있겠다, 한 줄기 안도감을 가지는 내가 혐오스러울 뿐이다.

지헌이 여행에서 돌아올 즈음이었나, 정지헌이 부담스럽기 시작한 건 꽤 되었다.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할 때는 늦었다. 발 빼기에는 너무 늦어 버렸다.

시계탑까지 나갈 필요도 없었다. 수업이 끝나자 지헌은 나를 낚아채서 근처 고깃집으로 데려갔다.

“꼭꼭 씹어 먹어.”

상추쌈을 야무지게 싸서 내 입에 넣어 주면서 내가 애리에게 할 법한 멘트를 날렸다.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입을 벌렸다. 지헌은 자신의 의도대로 일이 풀려서 기분이 좋아 보였다. 연신 흐뭇한 미소를 날리며 알뜰살뜰 나를 챙겨 주었다.

고기 굽는 중간중간 쌈을 싸 주고 파 겉절이도 입에 넣어 주고 난리도 아니다. 나는 다정한 연인 코스프레에 적응하지 못하고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다가 나중에는 자포자기해서 지헌이 시키는 대로 했다.

될 대로 돼라. 내 일인데 마냥 손 놓고 지켜보는 심정이 되었다.

양쪽 볼 가득 튀어나온 얼굴이 뭐가 예쁘다고 지헌은 흐뭇하게 쳐다보다가 상추를 손 위에 놓고 또 쌈을 싸 주었다.

“아, 해.”

무리하게 입 안의 음식을 씹어 넘기는데 지헌이 물컵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

“물도 마셔 가면서 천천히 먹어.”

나는 참다못해 그의 손을 밀어내고 정색했다.

“적당히 해라.”

지헌은 아랑곳하지 않고 부담스러운 눈빛을 퍼부으며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귀 뒤에 꽂아 주었다.

“너 먹다 체할까 봐 그래. 억지로 끌려와서 앉아 있는 얼굴이잖아.”

알긴 아는구나. 혼자 감정에 도취해서 상대방 기분 따위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 같더니.

“그래도 잘 먹으니까 좋네. 아, 해.”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나는 지헌에게 눈을 흘기고 입을 벌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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